가장 좋은 음식을 꼽으라면? 음, 이건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다. 얼마 전 펴낸 책과 여러 칼럼에서 두부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아닌 것도 같다. 때론 입맛이란 게 마음보다 더 변덕이 심해서 지금 당장 나한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꼽으라면 아마도 굴을 덥석 집어 들 것 같다. 찬바람이 뺨을 때리는 이 겨울, 최고의 식재료라면 단연 굴이 아닐까. 10월이 되면 나는 어서 11월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그건 순전히 굴 때문이다. (굴은 11월 1일부터 먹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굴을 먹기 시작한 이후 굴은 단 한 번도 맛이 없었던 적이 없던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오후 4시 11분이다. 나는 지금 바다가 보이는 강릉의 어느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통유리 창밖으로 넘실대는 파도를 보며 굴튀김을 떠올리고 있다. 깊은 동해 바다에 굴이 있을리 없지만, 그래도 바닷가니까 굴이 생각난다. 그리고 여기에 빠질 수 없는 맥주 한 잔. 얼른 이 글을 쓰고 숙소로 돌아가 굴튀김을 만들어 맥주를 목구멍 속으로 콸콸콸 들이붓고 싶은 마음뿐이다. 얼마 전, 강릉에 온 배우 K선생이 “내가 이제서야 맥주를 제대로 맛있게 먹는 법을 알게 됐지 뭐야.” 하셨다. 그 방법이 뭡니까요? “얌전히 마셔서는 안 돼. 맥주는 말이야 목구멍을 열고 벌컥벌컥 마셔야 해.” 앗 그렇군요. 오늘은 굴튀김을 앞에 두고 그렇게 마셔보겠습니다.
강릉에 온 건 뭔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다. 살다 보면 도망쳐야 할 때가 있다. 삶이란 그라운드에는 언제나 내 편은 적고 적들은 사방에 드글거리는 법이니까. 도망은 때로 도움이 된다. 일찍이 손자도 그걸 알고 있었다. 삼십육계줄행랑.
도망치기 좋은 곳이라면 단연 바다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먼바다에서 돌아오는 고깃배의 궤적을 바라보며 뺨을 때리는 세찬 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서울에서의 일은 나와는 상관 없는 먼먼 적도 부근 어느 나라의 일처럼 느껴진다. 적이나 복수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
바다 쪽으로 냅다 달리는 것이 어렵다면 주방은 또다른 좋은 선택지가 된다. 육수를 내고 양파를 썰고 마늘을 다지다 보면 적들의 서늘한 시선 따위는 잊을 수가 있으니까. 앞으로는 웃으며 등 뒤로 감추고 있는 그의 칼도 빌려쓰고 싶고 마늘이라도 다져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잠깐 칼 좀 빌려주세요. 날카롭게 잘 갈았죠? 마늘 다섯 쪽만 다져주세요. 주방에서의 일은 상당히 분주하게 돌아가서, 잠깐 한 눈을 팔면 재료가 타거나 퍼지거나 물러 버린다. 요리는 타이밍이 중요해서 집중 또 집중해야 한다. 특히나 나 같은 왕초보는 언제나 타이머를 맞춰두고 땡 하는 소리가 나면 1초라도 늦을세라 불을 끄고, 물을 붓고, 채소를 건져 낸다. 도마와 가스레인지, 냉장고 사이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에라 모르겠다, 복수는 세월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멀찌감치 밀어두게 된다. 그까짓 복수 따위가 뭐라고요. 저는 파스타면을 지금 건져야 한다니까요.
자, 오늘은 굴튀김이다. 일단 굴을 깨끗하기 씻기. 무를 갈아 굴을 씻는다고 하지만 그것까지는 너무 귀찮다. 어른은 말이야, 괴로운 건 참아도 귀찮은 건 못 참는 법이거든. 물을 받은 스테인리스 대야에 굴을 부은 후 소금 한 티스푼을 넣고 손으로 조물거리며 씻어주면 검은색 불순물이 나온다. 체에 담은 후 흐르는 물에 두세 번 살짝 씻어주면 된다.
그 다음엔 실파와 양파, 청양고추 다지기. 나는 뭔가를 썰고 다져야 한다면 되도록 얇게 썰고 부드럽게 다질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뭔가 성심을 다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도록 말이다. 일도 마찬가지. 아무튼 잘게 다지면 굴의 식감을 방해하지 않아 좋다. 양파는 채를 썰어 식초를 약간 푼 물에 담가두자. 그래야 매운맛이 빠지니까.
계란은 두 개면 충분하다. 노른자를 잘 푼 다음 다져 놓은 채소를 넣고 다시 잘 저어준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주문을 외우면 더 좋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분명 더 맛있어진다. 이건 내가 사진 강의에서도 하는 말이다. "사진을 찍을 때 속으로 ‘사랑해' 하고 찍으세요. 그러면 피사체가 더 사랑스럽게 나온거든요." 수강생들은 "에이~." 하고 웃어 넘기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앞으로 그들이 사진 찍을 때는 '사랑해'하고 찍을 것이라는 걸. 후후. 진짜다. 국수를 찍을 때도 ‘사랑해’ 하면서 찍으면 국수를 더 맛있게 찍을 수 있다. (여러분도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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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됐다. 그동안 굴에 물이 웬만큼 빠졌을 테니 굴에 튀김가루를 묻혀야 한다. 접시에 놓고 굴 하나씩 튀김가루를 묻히는 것도 좋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어른 특히 남자 어른은 귀찮은 건 못 참는다. 그들은 대부분의 인생을 귀찮은 일은 모른 체 하거나 남에게 미루며 살아왔으니까. 비닐에 튀김가루를 넣은 후 굴을 몽땅 넣고 쉐킷쉐킷하면 간단하다. 이제는 충분히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계란물에 한 번 빠졌다가 나온 굴을 얌전하게 프라이팬 위에 올려주는 일. 지글지글 익어가는 굴튀김 클로즈 업.
소스는 두 가지. 첫째는 채 썬 양파에 홀스래디쉬 소스를 뿌린 뒤 여기에 케이퍼를 넉넉하게 더해 준 것. 둘째는 간장에 식초를 섞고 고춧가루를 약간 뿌린 것.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기꼬망 회 간장. 왜냐하면 이건 굴튀김이니까. 어떻게 해도 맛있으니까. 아 참, 계란을 두 개 풀었다면 분명 남게 되어 있다. 여기에 남은 굴 몇 개를 몽땅 담그고 전처럼 투박하게 부친다. 이건 젓가락으로 찢어먹는다.
나는 참을성이 약한 사람이다. 식탁에 앉자마자 바로 먹어야 한다. 식탁에 굴튀김이 가지런히 담긴 접시를 두고서는 ‘아차 맥주를 가져오지 않았군.’ 하며 냉장고로 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아차, 소스를 준비하지 않았군.’ 하며 다시 주방 서랍장 문을 여는 것도 약간 짜증 나는 일이다. 그래서 소스나 술 등은 미리 식탁에 세팅을 해준다. 중국집에서도 단무지와 양파를 먼저 내주지 않는가? 짜장면이 나오면 바로 먹을 수 있어야 하니까.
앞서 말했다시피 소스는 간장과 홀스래디쉬 두 가지다. 그래서 술도 두 가지다. 맥주와 화이트 와인. 간장을 찍어서는 맥주를, 홀스래디쉬를 찍어서는 와인을! 이것이 내가 굴튀김을 먹는 방법이다. 투수가 직구와 커브를 적절하게 섞어 던지는 것과 같다. 아, 근데 이건 굴튀김을 먹을 때만 이렇게 한답니다. 매일매일 뒤죽박죽으로 마시는 건 아니에요
굴이 담긴 접시 얼굴을 가까이 댄다. 코끝에 굴 향과 기름 냄새가 어린다. 매력적인 굴향과 안온한 기름 냄새가 기분 좋게 섞여 있다. 음. 이게 바로 겨울의 행복이지. 간장에 먼저? 아니, 홀스래디쉬에 먼저? 일단 간장. 맥주가 와인 앞에 와야 하니까.
굴튀김 하나를 간장에 찍어 먹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입 속에 굴튀김의 풍성하고 기름진 맛이 상당히 두껍고 진하게 남는다. 조금 있다가 맥주의 상쾌함이 폭포처럼 따라온다. 대단한 맛이다. 그래 이 맛이지! 역시 굴튀김의 파트너로는 맥주만 한 것이 없지. 슬라이더 다음에 따라오는 빠른 직구다. 이번엔 홀스래디쉬 소스. 홀스래디쉬와 양파가 굴 향을 한껏 높여준다. 여기에 화이트 와인 한 잔. 아, 이건 맥주와는 또 다른 조합이다. 뭔가 두근두근대는 맛이다. 싱커와 커브의 화려한 조합이라고 할까? 역시 굴튀김의 파트너로는 와인이 최고야. 잘 던지고 잘 받고. 아니 그러니까, 굴튀김엔 맥주라는 겁니까? 와인이라는 겁니까? 아, 이건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다. 아무튼 뭐, 음식이든 인생이든 좋은 파트너를 만난다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고 얼버무리는 수밖에.
바다를 바라본다. 세찬 겨울 파도가 수평선 너머에서 힘껏 달려오고 있다. 고개를 돌리는 곳에 바다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고개를 돌리는 곳에 굴튀김과 맥주, 그리고 와인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인생인가. 나도 옛날엔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내였단다. 세월이 복수 따위나 생각하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린 거지. 굴튀김과 맥주와 와인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적들이여, 오늘은 평화로운 저녁 되시길. 🔖 |